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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6 가을문화역사기행여주 명성황후 생가와 감고당을 찾아 가을여행을 떠나다

가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계절에 떠난 무작정 여행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16일, 무작정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갈 곳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떠나는 여행, 얼마 만에 맛보는 자유로움인가? 1시간여를 달려 찾아간 곳은 여주시였다. 여주시 여주읍 명성로 71(능현리)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옆에는 서울서 옮겨온 감고당이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인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으로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복원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인 1851년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복원이 되었다고 하지만 집안을 돌아보면 여염집치고는 잘 정돈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양편으로 행랑채가 늘어서 있다. 여흥민씨는 우리나라 역사 상 8명의 왕비를 낸 유서 깊은 문중이다. 그런 여흥민씨의 집터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전형적인 중부지방 민가로 지어진 집

행랑체보다 높게 터를 잡고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안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높게 앉은 사랑채 밖으로는 집 앞에 널려진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지는 부분에 작은 협문을 내어 별당채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별당채는 일자형 초가로 방과 대청이 있는데 이 별당채가 바로 명성황후가 8세까지 자랐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파란만장한 한국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갑오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다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현재는 명성황후 생가 앞에 기념관을 짓고 일본에서 생가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명상황후 생가 옆에는 민가마을을 조성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을 마련했다. 음식이나 기념품, 전통혼래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이곳은 늘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명성황후 생가 정비를 하면서 서울에 있던 감고당을 옮겨오고 민가마을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주변에는 연못과 공터를 마련하고 앞으로는 넓은 주차공간을 마련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두 명의 황후가 살았던 집 감고당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있는 감고당은 이 자리에 있던 가옥이 아니다. 원래 감고당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편에 있었다. 그 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여주군은 명성황후 생가의 성역화 작업 당시였기에 2006년 현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차례 이전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변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건축구조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감고당의 편액은 1761년 영조대왕이 효성이 지극한 인현황후를 기려 친필로 써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감고당은 조선조에 두 명의 황후가 기거하던 집으로 유명하다.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물러나면서, 복위가 될 때까지 5년간을 이곳 감고당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8세에 서울로 올라간 뒤 왕비로 책봉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렇듯 감고당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옥으로 유명하다.

 

감고당 옆에 서 있는 소원바위

감고당과 옆 민가마을 뒤편에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소원바위’라고 부른다. 명성황후의 부친 민치록은 스승인 오희상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오씨와 사별한 후 재혼을 한 부인이 바로 나중에 한창부부인이 된 한산 이씨다. 이들 부부사이에선 1남 2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걱정하던 부부는 집 인근에 소재한 바위를 찾아가 정성으로 자녀를 점지해 주기를 빌었다.

정성이 효험을 보았는지 민치록이 53세 되던 해에 딸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명성황후가 되었다. 명성황후가 태어나던 날인 1851년 11월 17일 새벽, 붉은 빛이 비치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고 전하는데 어린 여자아이가 나중에 큰일을 할 것을 예견하는 전조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소원바위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명성황후 생가와 소원바위, 김고당을 돌아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서운하다. 한국민속촌을 찾아가면 99칸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다. 바로 수원 팔달산 밑 남창동에 자리하고 있던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부르는 이 가옥은 철종 12년인 1867년에 유학자인 이병진 선생이 건축했다고 한다. 수원 화성 내 팔달산 아래 지은 이집은 (현 수원시 남창동 95번지 일대) 1973년에 원형 그대로 민속촌으로 옮겨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고택 200여 채를 돌아보았다. 그 많은 집을 보면서 늘 마음 한 편에 아쉬움이 바로 이 거대한 고택이 옛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돌아보기 위해 수원화성 안을 찾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가을에 떠난 여행,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를 돌아보면서 다시 생각나게 만든 것이 바로 남창동 99칸의 양반가이다.

하주성 기자  rja4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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