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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엔 역시 여행이 최고야!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서 만난 보물 제1976호 명종태실

태봉이나 태재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곳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 두는 작은 석실을 말한다. 마을이름까지도 ‘태봉리’리고 한다. 그 산 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높아 보물 제 1976호로 지정된 명종태실을 찾아갔다.

이곳에 태를 묻은 명종(1545~1567)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다. 중종이 죽고 큰 아들인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를 한 명종 대신 어머니인 문정황후가 왕이 나이가 어리다는 구실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명종은 왕위에 있을 당시 왜의 잦은 침략을 당했고 임꺽정이 혼란한 틈을 타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를 휩쓸고 다니기도 했다.

중종 33년인 1538년에 건립된 명종 태실

명종 태실은 중종 33년인 1538년에 건립되었다. 정말이지 오르기 싫은 태봉의 가파른 길을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면서 겨우 올랐다. 태봉 정상부근까지 가파른 비탈을 따라 오르면 위에는 소방도로가 나 있어 걷기에 편해진다. 산 아래편에는 대밭이 있었는데 이곳 소방도로를 따라 산죽이 양편으로 자라고 있다.

태봉 위는 약 40평 정도의 넓이로 조성하였다. 방형의 대좌 위에 태를 넣은 태함을 석종형 부도의 태실로 마련했으며, 그 위에 8각의 옥개석을 놓고 보주형의 석재로 마감하였다. 석종형 부도 전체 높이는 273㎝, 태실의 높이는 90㎝이며, 각 변이 약 2m인 8각 난간으로 둘러져 있어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태실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가 서 있다. 하나의 비에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瑃齡阿只氏胎室)’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글씨가 지워져 알아보기 힘들다. 이 비는 1538년인 중종 33년에 세운 비이다. 이 비는 태실을 조성하면서 세웠다.

그 옆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음각되어 있는 비는 명종 1년인 1546년에 명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태실을 봉안해야 하기 때문에 건립된 비이다. 이 비는 귀부와 이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또 한기의 비는 종전의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숙종 37년인 1711년에 ‘왕자전하태실비(王子殿下胎室碑)’라는 글씨를 각인하여 세웠다. 이 비는 등이 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 대좌 위에 용과 구름무늬로 새긴 이수로 조형하였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안면도라고 해요”

명종태실. 태실의 석종형 부도 앞에서 먼 곳을 바라본다. 이곳에 오르기가 그렇게 싫었던 것도 사실은 힘이 든 이유도 있었지만, ‘눈물의 왕’이라고 불린 명종의 태실 앞에 선다는 것이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1545년 7월 6일 명종이 즉위했으니 나이 12세였다.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황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부터 명종은 그저 허울분인 왕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사에 비판적인 인사들은 가차없이 내치는 대비 문정황후로 인해 결국 을사사화까지 일어났지만 명종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어머니 문정황후의 그늘에 가려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하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다. 명종은 어머니 문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을 시작했지만 2년 후인 명종 22년(1567년) 6월,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안면도라고 해요. 날이 좋으면 더 멀리까지 보인다네요”

답사에 동행한 지인이 하는 말이다. 세상살이에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이곳에 올라 멀리 서쪽을 바라보면 속이 트인다고 말하는 지인. 하지만 난 이곳에 오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평생을 어머니 문전황후의 그늘에 가려 마음껏 왕으로서 친정을 펼치지 못한 명종. 그리고 젊은 나이인 34세를 일기로 왕위를 이을 후사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명종. 그의 생에를 알기에 이곳을 오르면 역사의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주성 기자  rja4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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